문제
회화 연습 의지는 있으나, 앱을 열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진입 장벽입니다. 출석이나 퀴즈 같은 부가 기능은 학습 지속에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.
그래서 형태를 뒤집었습니다. 앱 내 음성 채팅이 아니라 ‘전화로 걸려오는 회화’. 출석·퀴즈처럼 회화에 불필요한 기능은 모두 걷어내고 통화와 리포트만 남겼습니다. ChatGPT·듀오링고·스픽은 모두 앱 내 음성 채팅 기반이라, 전화 수신과 학습 리포트만 남긴 형태로 차별점을 두었습니다.

기술적 판단 ① — 그리고 실패
GPT 실시간 음성 API 비용이 과도했습니다.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작은 오픈소스 LLM을 가져와 창업입주기업 컴퓨터실에 서버를 띄워 직접 호스팅했습니다.
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. 전화 답변 응답이 3초를 넘게 걸렸고, 모델은 비슷한 말만 반복했습니다. 회화 서비스에서 3초는 대화가 끊기는 시간입니다.
트레이드오프: 비용을 택하고 품질을 포기했는데, 품질이 서비스의 존재 이유였다.
판단을 뒤집어 GPT API로 전환했습니다. 대신 비용 구조를 다른 곳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.
기술적 판단 ② — 비용 구조를 시장으로 푼다
B2C에서 B2B(소규모 영어학원)로 타깃을 바꿨습니다. 학원 객단가로 API 비용 구조를 성립시킨 것입니다. 동시에 목적도 ‘회화’에서 ‘복습’으로 좁혔습니다. 학원이 그날의 주제와 핵심 표현을 입력하면 그 표현이 학생 통화에 반드시 등장하도록 했고, 통화 종료 후 리포트와 월 1회 총평 리포트로 회수되게 설계했습니다.
시장 검증 — 거절, 그리고 예상과 다른 이유
서비스 완성 후 실제 영어학원에 직접 찾아가 선생님들께 PT를 진행했습니다. 결과는 거절이었습니다. 그런데 거절 사유가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.

“신생 기업의 불안정성을 감수하고 도입했다가 서비스가 종료되면, 원생 입장에서는 줬다가 뺏는 느낌이 된다”
“기존에 잘 굴러가던 시스템을 굳이 새로운 도전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”
“기능이 별로다”가 아니었습니다. 몇 달을 쏟은 기능 품질은 구매 결정 요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. B2B에서 구매를 가르는 것은 기능이 아니라 도입 리스크와 전환 비용이었습니다.
팀에서의 역할
거절 직후가 팀에서 제 역할이 가장 분명했던 순간이었습니다. 몇 달을 쏟은 서비스를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 하는 상황이라 팀원들의 의욕이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습니다.

저는 이 피드백을 실패 판정이 아니라 ‘학원이라는 시장이 요구하는 도입 조건’을 확인한 결과로 정리해 문서로 공유했습니다. 그리고 그 조건을 뒤집은 다음 방향을 먼저 제안했습니다. ‘제약이 적고 가볍게 쓸 수 있는 서비스’. 그것이 다음 기획의 출발 조건이 되었고, 그렇게 나온 것이 Runny입니다.
배운 것
- 기술 선택은 비용·품질·시장 중 무엇을 포기할지의 문제다
- B2B 고객이 사지 않는 이유는 대개 기능이 아니라 도입 리스크와 전환 비용이다
- 만들기 전에 물어봤어야 할 것을 만들고 나서 알았다. 이후로는 요구사항을 사용자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채 설계를 시작하지 않는다
